4. 도급업무 수행에 필요한 정보 제공으로서의 작업표준서ㆍ매뉴얼
작업표준서, 작업계획서, 매뉴얼 등에 대해서도 법원은 도급업무 수행에 필요한 정보 전달이나 업무상 필요에 의한 소통에 그치는지, 아니면 세부 작업방식까지 구속하는 지시인지를 구체적으로 살피는 것으로 보입니다. ‘도급계약상 도급인이 행사하는 지시권에는 일의 완성에 필요한 정보 제공이 포함되므로, 작업계획서ㆍ작업지시서 등 매뉴얼이 존재한다는 사정만으로 곧바로 지휘ㆍ명령이 있다고 평가할 수 없고, 그것이 작업방법에 관한 구체적 지침인지 아니면 단지 ‘일의 결과’에 필요한 객관적 정보인지를 따져 구속력 있는 지시인지를 판단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울고등법원은 자동차 범퍼에 랩가드를 부착하는 업무를 수행한 협력업체 근로자들에 대하여, 서열지시서는 ‘일의 결과’에 관한 정보일 뿐 ‘일의 방법’에 관한 지시로 보기 어렵고, 작업표준서도 협력업체가 직접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 등을 들어 구속력 있는 지시를 부정하였습니다(서울고등법원(인천) 2026. 1. 15. 선고 2025나10637 판결).
나아가 작업표준이나 매뉴얼의 작성 주체, 작성ㆍ변경에 관한 협력업체의 관여 정도 등도 중요한 판단요소가 됩니다. 대법원은 앞서 본 제철소 냉연제품 포장업무에 관한 판결에서 협력업체가 전문성을 바탕으로 포장방법의 개선ㆍ변경을 제안하였던 점 등에 비추어 작업표준서에 협력업체의 경험과 의견이 실질적으로 반영되었을 소지가 크므로, 피고 회사가 이를 통해 구속력 있는 지시를 하였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다른 제철소 사내협력업체 근로자 사건에서도, 서울중앙지방법원은 피고 회사가 마련한 ‘포장 및 표시 규격’은 균일한 포장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내부 기준이고 ‘설비 매뉴얼’도 설비 운영법에 대한 설명서 수준에 불과한 반면, 협력업체가 실제 노하우가 담긴 자체 포장 매뉴얼 등을 작성ㆍ사용하였다는 점 등을 들어 상당한 지휘ㆍ명령을 부정하였습니다.
대법원은 완성차 출고 전 사전점검 등 PRS 업무를 담당한 협력업체 근로자들에게 제공된 체크시트ㆍ차량설명서ㆍ업무 매뉴얼 등이 도급업무 내용을 정하는 표준에 불과하다고 보았고(대법원 2023. 7. 13. 선고 2022다275885 판결, 대법원 2023. 6. 29. 선고 2022다275892 판결), 앞서 본 제철소 기계ㆍ전기정비 등 업무에 관한 판결에서도 작업표준서를 사내협력업체가 직접 작성한 이상 그 내용을 도급인이 사실상 결정ㆍ통제하였는지를 별도로 살펴야 한다는 취지로 판단하였습니다. 최근의 판결들은 이러한 태도의 연장선에서, 작업표준서나 매뉴얼 등의 성격과 작성 경위 등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피는 것으로 보입니다.
5. 장소ㆍ업무의 구분과 생산공정 연동성을 중심으로 한 사업 편입성 판단
사업에의 실질적 편입 여부에 관하여, 법원은 PRS 업무가 자동차 생산공장과 분리된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생산 후 물류업무로서 직접 생산공정과 구별되고, 피고 회사 소속 근로자의 업무와도 명확히 구분된다는 점 등을 들어 사업 편입성을 부정한 바 있습니다(서울고등법원 2022. 8. 19. 선고 2021나2009898 판결 및 2021나2009904 판결).
최근 판결들도 이러한 기준에 따라, 협력업체 근로자들의 업무가 직접 생산공정과 장소적ㆍ기능적으로 구분되는지, 생산공정의 운영과 즉각적ㆍ밀접하게 연동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피고 있습니다. 앞서 본 서울중앙지방법원의 제철소 사내협력업체 근로자 사건과 서울고등법원(인천)의 제철소 중장비 운송ㆍ정비ㆍ폐수처리업무 사건에서, 법원은 폐염산 처리업무나 폐수처리업무가 직접 생산공정과 떨어진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등 생산공정의 일부로 보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앞서 본 제철소 냉연제품 포장업무 사건에서도, 법원은 포장업무가 생산공정이 완료된 후 야드에 적재된 코일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업무라는 점에서 생산공정의 운영현황과 즉각적ㆍ밀접한 연관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보아 사업 편입성을 부정하였습니다.
나아가 ‘하나의 작업집단을 이루어 공동 작업을 하였는지’에 관하여도, 단순한 시간적ㆍ장소적 연속성이나 일시적 협력만으로 이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확인됩니다. 앞서 본 완성차 범퍼 랩가드 부착업무 사건에서, 법원은 해당 업무가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다른 공정과 시간적ㆍ장소적으로 연속하여 이루어졌더라도, 피고 회사 및 다른 협력업체의 업무와 구별되는 별개의 업무인 이상 같은 벨트에서 작업하였다는 사정만으로 하나의 작업집단을 이루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또한 앞서 본 제철소 중장비 운송ㆍ정비ㆍ폐수처리업무 사건과 제철소 냉연제품 포장업무 사건에서, 법원은 문제 상황 발생 시 피고 회사가 협력업체에 업무 수행이나 조치를 요청하였다는 사정만으로 하나의 작업집단을 이루어 공동 작업을 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취지로도 판단하였습니다.
6. 마치며
이상과 같은 최근 판결의 흐름은, 대법원이 2015년에 제시한 도급과 근로자파견의 구별 기준에 관한 법리가 개별 사안에 적용ㆍ축적되면서 그 판단이 점차 정교해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사내하도급 구조에서는 사업장ㆍ협력업체ㆍ공정뿐 아니라 근로자, 계쟁기간, 구체적인 업무 내용과 수행 방식 등에 따라 근로관계의 실질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구체적 증거를 바탕으로 이를 개별적으로 판단하려는 최근 판결의 태도는 ‘근로관계의 실질’에 따라 근로자파견관계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위 대법원 판결의 취지에도 부합합니다.
이러한 흐름 아래에서는 근로관계의 실질에 관한 주장ㆍ증명의 구체화 정도가 법원의 판단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근로자파견관계의 성립을 주장하는 측은 협력업체나 공정 단위의 일반적 주장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근로자별ㆍ계쟁기간별 업무 수행 실태에 관한 구체적인 주장ㆍ증명이 요구될 수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대로 사용사업주로 지목된 도급인은 MES가 실제 업무에 활용되는 방식, 작업표준서ㆍ매뉴얼의 작성 주체와 경위 등을 면밀히 확인하여, 그것이 상당한 지휘ㆍ명령이 아니라 도급업무 수행에 필요한 정보 제공에 그친다는 점을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앞으로도 사내하도급 관계가 파견법상 근로자파견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특정 시스템이나 문서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근로자ㆍ기간ㆍ업무 단위로 확인되는 구체적 근로관계의 실질에 따라 판단될 것으로 보입니다.
✻ 이 글은 월간 노동법률 2026년 7월호에 게재된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