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 론
화재 사고의 경우 다른 사고와 달리 화재 현장이 소훼되어 원인 조사의 단서가 대부분 소멸되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소방서, 경찰서 및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등 조사기관도 화재 원인을 정확히 밝혀내기 어려우며, 단락흔의 존재 등 간접사실을 통해 화재 원인을 '추정'하거나 그마저도 불가능하여 '원인 미상'의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화재 사고는 통상 광범위한 피해를 야기하고 그러한 피해의 정도가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큰 피해가 발생한 경우에도 화재 원인이 정확히 규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손해배상청구가 불가능하다면 이는 피해자에게 너무도 가혹한 일이 될 것입니다. 반면 원인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화재 사고와 관련하여 화재가 발생한 장소 또는 물건을 점유하거나 소유하는 사람에게 손해배상책임을 묻는 것 역시 조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화재 사고로 인한 손해의 배상의무자와 책임의 범위를 판단하는 일은 위와 같이 서로 상반되는 이해관계를 조화시키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며, 하나의 사고에 대한 법원의 결론이 하급심과 상급심 사이에, 또는 복수의 재판부 사이에서 엇갈리는 경우가 많은 현실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화재 사고의 피해자 또는 피해자에게 보험금을 지급한 보험자는 가해자의 손해배상책임을 추궁함에 있어 무과실책임 또는 위험책임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 입증의 부담이 비교적 가벼운 '공작물책임'(민법 제758조)을 청구원인으로 주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편 우리나라는 실화자에게 중대한 과실이 있는 경우에만 손해배상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한 「실화책임에 관한 법률」(이하 '실화책임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실화책임법이 정한 불법행위책임과 공작물책임 등 특수불법행위책임의 관계가 매우 중요한 법률적 쟁점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실화책임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결정으로 실화책임법이 개정됨으로써, 실화책임과 공작물책임의 관계에 관한 기존의 논의는 변경이 불가피하게 되었으므로, 구 실화책임법에 대한 헌법불합치결정 및 개정법의 취지를 살펴보고(아래 2항) 실화책임법 개정 이후 실화책임과 공작물책임의 관계에 관해 간략히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아래 3항).
2. 실화책임법의 개정 경위 및 내용
가. 실화책임법의 개정 내용
구 실화책임법은 실화로 인한 연소피해의 경우 실화자에게 중대한 과실이 있는 경우에만 손해배상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구 실화책임법에 대해서는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하였고(헌법재판소 2007. 8. 30. 선고 2004헌가25 결정) 이에 따라 실화책임법이 개정되었습니다(2009. 5. 8. 법률 제96548호로 개정ㆍ시행).
구 실화책임법 및 현행 실화책임법의 규정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구 실화책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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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실화책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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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법 제750조의 규정은 실화의 경우에는 중대한 과실이 있을 때에 한하여 이를 적용한다. |
제1조(목적) 이 법은 실화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실화자에게 중대한 과실이 없는 경우 그 손해배상액의 경감에 관한 민법 제765조의 특례를 정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적용범위) 이 법은 실화로 인하여 화재가 발생한 경우 연소로 인한 부분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에 한하여 적용한다.
제3조(손해배상액의 경감)
① 실화가 중대한 과실로 인한 것이 아닌 경우 그로 인한 손해의 배상의무자는 법원에 손해 배상액의 경감을 청구할 수 있다. ② 법원은 제1항의 청구가 있을 경우에는 다음 각 호의 사정을 고려하여 그 손해배상액을 경 감 할 수 있다. 1. 화재의 원인과 규모 2. 피해의 대상과 정도 3. 연소 및 피해 확대의 원인 4. 피해 확대를 방지하기 위한 실화자의 노력 5. 배상의무자 및 피해자의 경제상태 6. 그 밖에 손해배상액을 결정할 때 고려할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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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헌법재판소 헌법불합치 결정의 취지
헌법재판소의 결정 취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다. 실화책임법의 합리성ㆍ제한최소성ㆍ법익균형성
실화책임법은 … 경과실로 인한 화재의 경우에 실화자의 손해배상책임을 감면하여 조절하는 방법을 택하지 아니하고, 실화자의 배상책임을 전부 부정하고 실화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을 부정하는 방법을 채택하였다.
화재피해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과실 정도가 가벼운 실화자를 가혹한 배상책임으로부터 구제할 필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입법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실화책임법이 채택한 방법은 입법목적의 달성에 필요한 정도를 벗어나 실화자의 보호에만 치중하고 실화피해자의 보호를 외면한 것이어서 합리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우선, 실화 및 연소의 피해에 대하여, 발화과정이나 연소과정에 과실이 있는 자는 다소간의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지만, 실화피해자에게는 책임질 사유가 없는 게 보통이다. 그러므로 실화 및 연소의 피해에 대하여 실화자의 책임을 전부 부정하고 그 손실을 전부 피해자에게 부담시키는 것은 합리성과 구체적 타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
그리고 실화 및 연소로 인한 피해가 예상외로 확대되어 그에 대한 배상책임을 전부 실화자에게 지우는 것이 가혹한 경우에는 민법 제765조에 의하여 구체적인 사정에 맞추어 실화자의 배상책임을 경감시킴으로써 실화자의 가혹한 부담을 합리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 이처럼 합리적인 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과실로 인한 화재의 경우에 실화자의 책임을 전부 부정하고 그 손실을 전부 피해자에게 부담시키는 것은 실화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을 입법목적상 필요한 최소한도를 벗어나 지나치게 많이 제한하는 것이다.
게다가 … 여러 가지 사항을 전혀 고려하지 아니한 채, 일률적으로 실화자의 손해배상책임과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을 부정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실화자만 보호하고 실화피해자의 보호를 외면한 것으로서 실화자 보호의 필요성과 실화피해자 보호의 필요성을 균형 있게 조화시킨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라. 소결(실화책임법의 위헌성을 해소하는 방법)
실화책임법은 실화자를 의외의 가혹한 배상책임으로부터 구제한다는 입법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실화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을 필요 이상으로 제한하고 법익균형의 원칙에도 위배되므로, 기본권 제한입법의 한계를 일탈하여 헌법 제23조 제1항, 제37조 제2항에 위반된다고 할 것이다. 대법원은 실화책임법이 발화점과 불가분의 일체를 이루는 직접화재에는 적용되지 않고 그로부터 연소한 부분에만 적용되며(대법원 1983. 12. 13. 선고 82다카1038 판결), 가스 폭발사고에는 적용되지 않고(대법원 1994. 6. 10. 선고 93다58813 판결), 공작물의 하자로 인하여 발생한 화재에는 적용되지 아니하며(대법원 1999. 2. 23. 선고 97다12082 판결), 채무불이행으로 인한 화재에도 적용되지 아니한다(대법원 1967. 10. 23. 선고 67다1919 판결, 대법원 1980. 11. 25. 선고 80다508 판결, 대법원 1994. 1. 28. 선고 93다43590 판결)고 해석함으로써, 실화책임법의 적용 범위를 축소시키고 있다. 그러나 대법원의 그러한 노력에 의하여 실화책임법의 위헌성이 완전히 해소된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실화책임법에 대한 위헌 선언은 피할 수 없다.
3. 공작물책임과 실화책임의 관계
가. 구 실화책임법 적용시의 대법원 판례
구 실화책임법 시절의 대법원은 실화책임법은 실화로 인하여 일단 화재가 발생한 경우에는 부근 가옥 기타 물건에 연소함으로써 그 피해가 예상외로 확대되어 실화자의 책임이 과다하게 되는 점을 고려하여 그 책임을 제한함으로써 실화자를 지나치게 가혹한 부담으로부터 구제하고자 하는 데 그 입법취지가 있고, 이러한 입법취지에 비추어 이 법률은 발화점과 불가분의 일체를 이루는 물건의 소실, 즉 직접화재에는 적용되지 아니하고, 그로부터 연소한 부분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함이 상당하다(대법원 2002. 12. 10. 선고 2001다9298 판결), 민법 제758조 제1항은 무과실책임을 인정한 것이고 구 실화책임법은 실화로 인하여 일단 화재가 발생한 경우에 그 책임을 중대한 과실로 인한 경우에 한정한 것이므로, 공작물 자체의 설치 보존상의 하자에 의하여 직접 발생한 화재로 인한 손해배상책임에 관하여는 민법 제758조 제1항이 적용되고, 그 화재로부터 연소한 부분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에 대하여는 구 실화책임법을 적용하여야 한다(대법원 1994. 3. 22. 선고 93다56404 판결, 대법원 2000. 1. 14. 선고 99다39548 판결 등)는 법리를 밝혀 왔습니다.
이러한 '직접화재-연소부분 구별설'의 입장에 의하더라도 '직접화재'와 '연소피해'를 구별하는 객관적 기준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며, 대법원은 직접화재의 범위를 대폭 확장함으로써 피해자의 보호를 도모하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나. 현행 실화책임법 하에서의 해석
현행 실화책임법 시행 이후 공작물책임과 실화책임의 관계를 정면으로 판단한 대법원 판결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실화책임법 개정 이후에도 과거 판례를 반복하는 하급심 판결도 있으나, 다음과 같은 이유로 공작물의 설치ㆍ보존의 하자로 인한 화재의 경우 직접화재와 연소부분을 구별함이 없이 모두 민법 제758조 제1항이 적용된다는 판결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서울고등법원 2011. 7. 21. 선고 2010나82402 판결).1)
① 구 실화책임법은 책임의 근거 규정에 가까운 형식을 가지고 있다. 즉 중대한 과실이 있는 경우에 한하여 배상책임의 근거 규정인 민법 제750조를 적용하도록 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현행 실화책임법은 책임의 경감에 관한 규정만을 두고 있을 뿐 그 책임근거를 밝히지 않고 있다. 따라서 어떠한 불법행위에 대하여 현행 실화책임법을 적용하여 책임을 경감하는 것은 몰라도 책임을 부담하게 할 수는 없게 되었다.
② 현행 실화책임법은 민법 제765조의 특례임을 밝히고 있는데, 민법 제765조는 민법 제5장의 규정에 의한 배상의무자에 대하여 적용되는 규정이다. 민법 제758조 제1항에 의한 배상의무자 역시 위 민법 제765조에서 그 대상으로 하고 있는 민법 제5장의 규정에 의한 배상의무자이고, 달리 공작물책임을 부담하는 배상의무자에 대하여 민법 제765조의 규정을 배제할 근거를 찾을 수 없다.
③ 구 실화책임법 아래에서 공작물 하자로 인한 화재의 경우 공작물책임(민법 제758조 제1항)과 구 실화책임법에 따른 책임(민법 제750조)은 선택적으로 적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공작물책임은 피해자의 보호를 위한 규정인 반면, 구 실화책임법은 실화자의 보호를 위한 규정이므로 어느 법이 적용되느냐에 따라 피해자와 실화자의 이해관계는 극명하게 엇갈리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쌍방의 이해관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방안이 필요하였고, 앞서 본 바와 같이 직접화재와 연소부분 구별에 따라 이를 각 적용하는 해석론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직접화재와 연소부분을 구별하는 명확한 기준을 설정하기 어렵고{예를 들면 종래 대법원 판결은 '공작물의 설치ㆍ보존상의 하자에 의하여 직접 발생한 화재라 함은 반드시 그 공작물 자체에 일어난 화재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화재가 발생한 차량이 건물 안으로 운행하여 들어가 발생한 화재를 직접화재로 보고 있다(대법원 1998. 3. 13. 선고 97다34112 판결)}, 연소에 따른 손해가 공작물의 하자와 상당인과관계가 있음에도 이를 부정하여야 할 이론적 근거를 찾기도 곤란하며, 최근에는 화재에 관한 고도의 위험성을 가진 공작물이 다수 설치되고 있음에도 연소에 대한 배상책임을 일률적으로 제한하는 것은 피해자 보호에 미흡한 측면이 있다는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위 해석론은 다소 불완전한 기준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현행 실화책임법 아래에서는 이와 같은 선택적 적용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즉 공작물책임은 피해자 보호를 위한 책임근거로서, 현행 실화책임법은 실화자를 위한 책임감경 조항으로서 중첩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중첩적인 적용을 통하여 실화자와 피해자의 이해관계를 합리적으로 조절할 수 있으며, 이는 종전의 직접화재와 연소부분 구별에 의한 획일적 기준보다 관계 당사자의 이해관계를 더 폭넓게 반영할 수 있는 유연한 기준으로 판단된다.
④ 이 사건 헌법재판소 결정은 실화자의 배상책임을 합리적으로 경감하는 방법이 존재함에도 일률적으로 실화자의 손해배상책임과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을 부정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취지이다. 종래의 해석론에 따라 화재로 인한 연소 피해에 관하여 공작물책임을 부정하고 민법 제750조에 의한 책임만을 부담하게 한다면 일반적으로 화재 원인에 대한 명확한 입증이 곤란한 점 등을 고려할 때 피해자에게만 과중한 입증책임을 부담하게 하는 것으로 이 사건 헌법재판소 결정에서 요구하는 실화자 보호의 필요성과 피해자 보호의 필요성의 균형을 무너뜨릴 우려가 있다.
위 하급심 판결의 해석론은 이론적으로도 정당하다고 생각되며, 공작물의 하자로 발생한 손해에 관한 책임을 합리적으로 분배하여 손해배상법의 이념을 달성하는 데에도 훨씬 유용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현행 실화책임법 하에서는 직접손해와 연소부분을 가리지 않고 공작물책임법을 적용하되 실화책임법을 적용하여 가해자의 책임을 합리적인 수준으로 제한하는 방향으로 법리가 확립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1) 서울고등법원 2010. 7. 16. 선고 2009나63924 판결, 서울중앙지방법원 2012. 3. 20. 선고 2011가합68475 판결도 같은 취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