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법인 지평지성 제4회 뉴스레터 (20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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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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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법무관으로 근무하던 2002년경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국정원 충북지부를 조사할 일이 있어 국정원에 충북지부의 위치와 방문가능시간을 알려달라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국정원에서는 국정원 소재지는 비공개대상으로서 국가기밀이므로 알려줄 수 없다는 회신을 보내왔습니다. 충북지부라면 청주에 있을 것이므로 일단 고속버스를 타고 청주로 갔습니다. 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아저씨 혹시 국정원 어디 있는지 아세요?”라고 묻자 “당연히 알죠”라고 하며 얼마 뒤 국정원 충북지부 앞에 내려줬습니다.

청주의 택시기사들이 모두 알고 있는 국정원 소재지가 법률상 보호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국가기밀일까요. 법률, 특히 어떠한 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한 경우 일정한 제재를 가하는 법률은 수범자(受範者)에게 충분히 기대할 수 있는 행위에 한정하여 규율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누구나 알고 있는 국정원 소재지를 국가기밀로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수범자에게 비현실적인 요구를 하는 법률들이 상당수 존재합니다.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이하 ‘도시정비법’)의 시공자 선정시기에 관한 규정도 앞서 언급한 비현실적인 법률 중 하나입니다. 현행 법률에 따르면 재건축조합은 사업시행인가 후, 재개발조합은 조합설립인가 후에 비로소 시공자를 선정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반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집니다. 원래 2002년 12월 30일 도시정비법이 제정될 때에는 정비사업의 종류를 구별하지 않고 사업시행인가 후로 시공자 선정시기를 정하였습니다.

당시 정부는 민간건설업자들이 재건축시장의 과열을 가져왔다는 판단 하에 건설사들이 재건축시장에 참여할 수 있는 시기를 최대한 뒤로 늦춤으로써 재건축시장을 규제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재건축시장의 과열은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막대한 수익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건설사들이 도시정비법의 규제를 우회하는 수단을 찾아 사업을 진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공익적 요청이 큰 재개발사업이 위축되는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건설사들이 조기에 참여할 유인을 잃은 것이 원인입니다.

정부는 다시 2005년 3월 18일 도시정비법을 개정하면서 시공자선정시기에 관한 도시정비법 제11조의 규율대상에서 재개발을 제외시켰습니다. 동시에 재개발사업에 대하여는 도시정비법 제정 이전처럼 건설사가 공동시행자로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법이 개정되자 예전처럼 건설사들은 재개발사업의 경우 조합설립이전부터 공동시행자 명목으로 사업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현재 시공자 선정의 효력을 다투고 있는 많은 사건들이 바로 이 시기에 추진위원회 단계에서(즉 조합설립인가 이전) 선정한 시공자(공동시행자) 선정의 효력입니다. 2007년말 추진위원회단계의 시공자 선정결의 효력을 부정한 부산고등법원 판결에 대한 상고가 대법원에서 심리불속행으로 기각되면서 이 문제는 어느 정도 논의가 마무리되는 것 같았습니다. 2008년 8월에는 대법원에서 명시적으로 시공자 선정 권한은 조합총회의 고유권한임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최근 서울고등법원의 일부 재판부에서는 추진위원회단계의 시공자선정결의 무효확인을 구하는 소에 대하여 그 유·무효를 다툴 법률상 이익을 부정하여 결과적으로 과거 추진위가 선정한 시공자가 사실상 유지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었습니다. 비현실적인 법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의 결과였습니다.

재건축이든 재개발이든 자본과 사업수행 노하우를 갖춘 건설사의 참여 없이는 제대로 사업이 될 수 없다. 엄연한 현실입니다. 부동산시장의 과열을 막아 국민의 주거생활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대전제는 지극히 옳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대전제를 충족하기 위하여는 현실을 직시하여 필요한 부분에 역량을 집중하는 영리한 규제가 필요합니다. 건설사의 조기참여로 시장이 과열되었다는 인식을 전제로 건설사의 초기단계 참여만 막으면 부동산시장이 안정될 것이라는 생각은 순진합니다.

도시정비법 개정안이 지난 1월 13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습니다. 개정법률은 재건축 역시 조합설립인가 이후로 시공자 선정시기를 앞당기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전보다 시공자 선정시기가 빨라진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여전히 규제의 초점을 잃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합설립이전 단계부터 상당한 비용과 사업수행 노하우가 필요한 것이 현실인 점을 고려할 때 조합설립단계까지 사업시행자의 능력을 보충할 제도를 마련하거나(현행법이 규정하는 정비사업전문관리업자로는 부족합니다), 아니면 건설사의 조기참여를 인정하되 부작용을 막을 수 있는 공정한 룰을 만드는 것이 올바른 규제의 방향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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