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달의 변호사

"하루 빨리 사무실의 변화된 환경과 새로운 고객에 적응하여야 겠지요."
1년 동안 미국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황승화 변호사는 뉴스레터팀을 만난 자리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 말을 하는 그의 모습에서 지평에 대한 깊은 애정과 새로운 고객에 대한 기대를 느낄 수 있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조금 검게 그을린 피부가 눈에 띌 뿐 부드럽고 건강한 미소는 여전했다. 이 달 뉴스레터팀은 황승화 변호사를 만나 미국 유학 시절의 이야기와 앞으로의 각오에 대해 들어보았다.
Q 유학을 막 다녀오셨는데, 어디서 어떤 공부를 하셨나요?

A 작년 2005년 6월말에 출국하여 미국 California주의 University of California, Davis의 Law School에서 LL.M.과정을 수료하였습니다. LL.M.이란 과정은 외국에서 법대를 졸업하거나 법률관련 실무를 경험한 사람들이 Law School에서 1년 정도 수학하는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작년의 경우 스위스, 태국, 일본, 중국, 요르단 등 세계 각지에서 온 10 여명의 LL.M.학생들과 함께 지냈는데요, 대부분의 학교생활은 3년 J.D과정을 밟는 미국 학생들 틈에 섞여 지내는데, 수업과 시험 기타 학사일정에 같이 참여 합니다.
매 학기 4-5과목 정도의 법률과목을 선택하여 수강하였는데, 저는 한국에서의 실무경험과 관련성이 높은 Corporate law, Securities law, Real estate financing, Negotiation 등의 과목을 주로 수강하였고 변호사의 공익활동에 관한 세미나 강좌도 수강하였습니다.

 
Q 한국에서도 법과대학을 졸업하셨는데, 미국 Law School은 한국의 그것과 어떤 점이 다르다고 느끼셨나요?

A 우선 교육목적이 명확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변호사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법률지식과 자질을 향상시키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개념과 논리 중심의 일방적 강의 대신, 질문과 토론 중심의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매우 활발하였습니다.
교수들은 대부분 변호사 실무를 경험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 자신의 변호사 경험을 토대로 한 현실적인 문제를 강의 중에 자주 제기하더군요. 예를 들어 증권거래법 강의 시간에 엄청난 양의 Registration documents를 검토해야 하는 Associate변호사의 애환을 말한다거나, 거래 종결일(흔히 Closing date라고 합니다)에 무수한 서류가 교환되고 뒤늦게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는 긴박한 상황을 언급하면서 '자네라면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에는 정답이 따로 없으므로, 교수와 학생이 서로의 생각을 자유롭게 이야기 합니다.
다음으로 개설강좌 역시 실무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가 수강한 Negotiation이라는 과목은 매 강의의 대부분을 학생들끼리 미리 정해진 협상주제를 놓고 협상을 진행한 후 그 결과를 다 같이 분석, 토론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어디에서도 Negotiation을 가르치지 않는 우리나라와 비교해 볼 때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Q 미국에서 공부를 통해, 변호사라는 직업관에 대해서나 개인적으로나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A 변호사의 공익활동에 관한 세미나 강좌를 수강하면서, 변호사집단이 거대한 미국 사회를 움직이는 힘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Johnson정부는 빈곤과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젊은 변호사들의 정의감에 호소하여 이들이 빈곤을 퇴치하기 위한 법률활동에 적극 나서도록 호소하였고 실제로 많은 젊은이들이 상대적인 박봉에도 불구하고 응하였다고 합니다.
저에 비하면 나이도 어리고 변호사 경험도 없는 J.D학생들과 Negotiation을 진행하면서 자주 느꼈는데, 일단 이들은 고객의 이익을 최대한 옹호하는 것이 변호사의 역할이라는 확고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국의 적지 않은 변호사의 경우 고객을 떠나 객관적으로 합리적이고 옳은 결론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이에 스스로를 가두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제 negotiation partner는 오히려 그러한 입장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Q 유학 생활 중 특별히 힘든 점은 있으셨나요? 그럴 때마다 활력소가 되어 준 것은 무엇인가요?

A 아무래도 의사소통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을 들 수 있겠지요. 수업시간 마다 최대한 제 생각을 정리하고 발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래도 의사소통이 자유롭지 못하니까 머리 속에서만 맴도는 안타까운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귀국 후 다시 변호사로서의 실무를 수행하여야 하는 제 입장에서는 이러한 어려움을 마냥 회피하지 말아야겠다는 적극적, 긍정적 사고를 갖도록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스치면서 인사하고 지나가기만 하는 상투적인 관계만으로는 미국 사회를 이해할 수 없고 의사소통의 향상을 도모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가급적 학생들 모임에 참여하려 했지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활력소라면 아무래도 시간적인 여유, 가족들과 함께 보낸 많은 시간을 들 수 있겠지요.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미국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고 성장하는 걸 보는 게 제일 흐뭇했던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Q 앞으로 지평에서 주로 맡으실 업무는 무엇이며, 다른 계획하는 분야가 있으신가요?

A 하루 빨리 사무실의 변화된 환경과 새로운 고객에 적응하여야 겠지요. 기존에 주로 해 오던 Project financing, SOC 등의 업무를 follow-up하면서 업무의 질을 높여 나가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그 외 ABS업무와 같이 우리 사무실에서 수행하고 있는 다른 업무들도 배워 유학 등의 사유로 구성원의 변동이 생기더라도 업무가 연속적으로 처리될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Q 미국 유학 생활 중에 겪었던 일 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증권거래법 강의 시간의 일이었습니다. 한 중증장애인 학생이 늘 강단 바로 밑에 휠체어에 앉아 수업을 들었는데, 가끔씩 이 학생과 교수님이 토론을 진행하곤 했습니다. 근데 이 학생은 거동이 많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어 저는 그 학생의 말이 무슨 얘기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혹시 안 믿으실 수도 있겠지만, 이건 영어랑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생각을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 그 학생과 토론 후 맞으면 맞다, 틀리면 틀리다고 솔직하게 지적해 주는 교수님과 이를 지켜보는 학생들의 자세 모두 인상적이었습니다.

LL.M. 학생들끼리 California주 대법원을 방문하여 대법원장님을 만나 대법원의 운영과 재판방식에 관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모임을 주선한 판사님과 토론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 판사님의 주된 발표 내용은 법원(법관)의 책임성(Accountability)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흔히 우리는 사법부의 독립에 관해 얘기하면서 그러한 독립의 정당성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혹은 그러한 독립을 어떻게 정당화 시킬 수 있는지에 관하여 그리 심각한 고민을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사법절차의 공정성과 효율성 제고를 위한 방안을 마련하고 이에 대한 시민사회의 비판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를 보일 때 사법에 대한 신뢰가 형성될 수 있다는 지적에 공감하면서 사법부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법조 전반에 적용되어야 할 원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아이 둘을 학교에 보내는 학부모로서 그곳 학교 교육에 대해서도 관심이 갔습니다. 우리 아이가 적응을 잘 할까 걱정도 많이 했는데, 지나고 보니 기우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멕시칸,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 등 다양한 인종이 섞여 지내는 공간이어서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세심했습니다. 학기초에 helper를 붙여주거나, 매일 영어공부를 따로 시키기도 했습니다. 학부모들이 아이들의 학습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던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도 아이들 학교에 가서 한국의 전통 명절과 전통 놀이를 가르쳐 주었는데 아이들이 무척 재미있어 하더군요. 그리고 1년 후에 한국으로 돌아갈 아이들에게 미국 학교에서의 추억을 잊지 않도록 학교 생활의 주요 과정을 찍은 사진을 CD로 만들어 주는 등 선생님의 세심한 정성이 고마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