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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률칼럼



김지홍 변호사
ghkim@jipyong.com

 

중재합의의 의미

‘중재합의’란 이미 발생하였거나 장래 발생할 수 있는 분쟁의 전부 또는 일부를 법원의 재판에 의하는 대신 중재인의 판정에 의하여 해결하기로 당사자들 간에 약속하는 것을 말합니다(주1). 중재합의는 계약서 말미에 ‘중재조항’을 삽입하는 방법으로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중재조항이 계약서에 포함되어 있으면 그 계약의 체결 및 이행에 관한 분쟁은 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법원은 중재합의의 대상에 대하여 소송이 제기되면 각하합니다(주2). 약속대로 중재로 분쟁을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법원은 중재절차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경우에 중재인 선정절차 등에 후견적으로 관여하거나,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한하여 중재판정을 취소할 수 있을 뿐입니다.

중재합의의 증가 추세

언제부터인가 중재조항을 포함한 계약이 늘고 있습니다. 국제거래시 계약서에 중재조항을 삽입하는 것은 이제 관행으로 정착되었고, 공사계약일반조건, 물품구매계약일반조건 등 표준약관에 중재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보니 국내계약에서도 중재합의를 하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중재에 의하여 분쟁을 해결해야 하는 경우도 점차 늘고 있습니다. 그런데 효력에 의문이 있는 부정확한 중재조항을 두는 바람에 본래의 분쟁이 아니라 분쟁의 해결방법에 대한 분쟁에 휩쓸려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중재절차에 관한 합의의 필요성

‘중재’란 일종의 ‘사적 재판’입니다. 법원의 재판이라면, 법원조직법 및 민사소송법에 의하여 소제기부터 사건의 배당, 심리, 판결에 이르기까지 재판의 모든 절차가 법률에 정해져 있습니다만, 사적 재판인 중재에 대하여는 그 어떠한 것도 미리 정해져 있지 아니합니다. 이는 당사자들에게 융통성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거꾸로 분쟁이 발생하였을 경우 조속하고 공정한 해결을 방해합니다. 그렇다고 당사자들이 계약을 체결할 때마다 매번 민사소송법에 상응하는 중재절차에 관한 합의서를 작성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권위 있는 중재기관의 중재규칙에 따르기로 약속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이 계약으로부터 발생되는 모든 분쟁은 대한상사중재원에서 중재규칙에 따라 중재로 최종 해결한다”는 식으로 약정합니다. 이렇게 되면 대한상사중재원이 중재인의 선정에서부터 중재판정문의 송달까지 모든 업무를 알아서 처리해 주며, 구체적 중재절차는 대한상사중재원이 미리 마련해 둔 중재규칙에 따르게 됩니다. 대한상사중재원 외에도 중재규칙을 제공하는 중재기관들은 아주 많은데, 그 중 대표적인 예를 들어 보면 ICC(International Chamber of Commerce), LCIA(London Court of International Arbitration), HKIAC(Hong Kong International Arbitration Centre), SIAC(Singapore Arbitration Centre), WIPO(World Intellectual Property Organization) 등이 있습니다. 중재기관의 도움 없이 전적으로 당사자들끼리 중재하는 것도 가능한데(이른바 ‘ad hoc arbitration’), 그 경우 채택할 수 있는 중재규칙으로는 UN국제통상법위원회가 제정한 UNCITRAL 중재규칙이 있습니다.

부정확한 중재합의의 효력

문제는 중재인 선정과 중재 절차에 관하여 잘못 합의하는 경우입니다. 예컨대 ‘대한상사중재원’의 중재규칙에 따른다고 하는 대신 ‘대한상공회의소’의 중재에 의한다고 약정한 사례가 있습니다(주3). 외국의 중재기관이나 중재규칙을 원용하다가 실수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컨대 국내 한 기업은 캘리포니아 소재 기업과 계약을 체결하면서 Trade Arbitration Committee of the State of California의 중재규칙에 따라 중재하기로 하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런 기관이나 중재규칙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러한 경우 과연 중재합의가 무효라고 보아 법원에 의한 재판을 못하게 해야 할 지 아니면 여전히 중재의 방법으로 분쟁을 해결하라고 하여야 할 지 다툼의 소지가 큽니다. 중재를 해야 한다면 어떻게 중재인을 선정하고 중재절차를 진행하여야 할 지도 문제입니다.

일부 판결 중에는 당사자들이 의도한 중재기관에 의한 중재가 불가능한 이상 중재합의 자체가 무효이고, 원칙으로 돌아와 소송으로 분쟁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있습니다(주4). 그러나 우리나라는 물론 외국의 법원들은 대부분 이러한 경우에도 중재합의는 유효하다고 봅니다. 장래 분쟁을 중재에 의하여 해결하겠다는 명시적 의사표시가 있는 한 유효한 중재합의로서의 요건은 충족한다는 것입니다(주5).

그렇다면 이러한 경우 중재인 선정과 중재절차는 어떻게 될까요. 미국 판결 중에는 아예 특정 중재기관의 중재규칙에 따라 중재할 것을 명한 사례가 있습니다(주6). 그러나 우리나라 중재법상으로는 이렇게 특정 중재기관을 이용하거나 특정 중재규칙에 따르라고 명령하는 것은 곤란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법상 법원은 중재법에 명시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체 중재절차에 관여할 수 없는데, 우리 중재법에는 중재절차의 지정에 관하여 아무런 규정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재법은 대신 당사자들이 중재인 선정에 대하여 합의하지 못할 경우 법원이 대신 선임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습니다(중재법 제12조 제3항 제2호). 따라서 위와 같이 부정확한 중재조항의 당사자가 중재를 원한다면 먼저 상대방에게 중재인 선정에 관하여 동의를 구해야 하고, 상대방이 불응하면 법원에 중재인 선정을 요구해야 할 것입닌다. 구체적 중재절차는 당사자들 사이에 합의가 되지 않는 한 선정된 중재인이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절차에 따르게 될 것입니다(중재법 제20조 제2항).

중재절차에 관한 정확한 규정의 필요성

이상과 같이 중재조항이 중재를 담당할 중재기관이나 적용될 중재규칙에 대하여 정확하게 규정하지 않고 있다고 하여 중재합의 자체가 무효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신속하고 경제적인 분쟁 해결이라는 중재의 취지는 퇴색하게 됩니다. 중재합의의 효력에 관하여 다툼이 생길 뿐만 아니라, 중재인 선정 단계부터 법원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중재인이 중재절차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에 대한 예측가능성도 떨어집니다. 따라서 계약서에 중재조항을 넣고자 한다면, 원용하고자 하는 중재기관과 중재규칙의 명칭이 정확한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삽입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것이 신속한 분쟁해결을 위하여 중재합의를 하는 당사자들의 뜻을 제대로 실현하는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각주]

(주1) 대법원 2007. 5. 31. 선고 20-05다74344 판결.

(주2) 중재법 제9조 제1항. 단 상대방이 이의없이 소송에 응하면 소송으로 분쟁을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주3) 서울고등법원 1980. 6. 26. 선고 80나535 판결 참조.

(주4) 국내 판결로는 서울고등법원 1980. 6. 25. 선고 80나535 판결 참조. 외국 사례로는 Nat’l Material Trading v. M/V Kaptan Cebi, No. 2:95-3673-23, 2:96-0095-23, 2:96-3288-23 (D.S.C. Mar. 13, 1997) 참조.

(주5) 대법원 2007. 5. 31. 선고 2005다74344 판결 참조. 다만 이 판결의 사안에서는 중재기관의 명칭을 잘못 기재하는 대신 처음부터 “제3기관의 중재를 받는다”고 하여 가능성을 열어두었습니다.

(주6) Warnes, S.A. v. Harvic Intern. Ltd., No. 92 Civ. 5515 RWS, slip op. at 2 (S.D.N.Y. Jun. 22, 1993). 이 판결의 법원은 미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고 사용되는 미국중재협회(American Arbitration Association) 중재규칙에 따르라고 명하였습니다.